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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에 첫눈이 늦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첫눈 오기를 기다리는 중에, 주말에 첫눈이 온다고 예보가 뜨면서 폭설이 예고되어 설렘 반, 걱정 반이었죠. 지난밤부터 무섭게 내려 폭설이겠구나 했는데 아침에 보니 반갑게도 하얗게 쌓인 눈은 폭설이 아니었습니다. 기분은 폭설이라도 용서하고픈 설렘이었는데 서설이 내렸으니 축복이죠. 눈이 내려 가까운 아차산엘 올라 첫눈이 내린 설경을 담아왔습니다. 먼저 설경을 영상으로 보시죠.

 

 

생태공원을 지나 산등성이를 타고 걸어 올라오면, 아차산성 발굴현장입니다.

첫눈이 내려 하얗게 쌓인 산길을 힘든지 모르고 올라갑니다.

 

우측에 아차산성 발굴현장

 

발굴현장을 지나는데 관계자 분이 잠겨 있는 철문을 열고 있어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흔쾌히 들어오십시오, 하네요.

 

잠시 점검차 들렸으니 잠깐 둘러보시는 정도는 안내를 해드리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수년간 지나다니면서 들어가 보지 못한 현장인데, 행운이네요, 감사합니다. 잠깐이라도 둘러볼 수 있다니 약간 흥분되는 듯, 기대가 뿜뿜입니다.

 

안으로 들어오니, 울타리에 가려서 간신히 찍을 수밖에 없던 현장을 그런 간섭 없이 여유로운 앵글로 찍을 수 있네요.

 

계단을 올라가면

 

숨겨진 유산을 찾고 있는 발굴 현장입니다.

 

눈 위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으로 어지러워 보이지만, 이곳 현장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네요. 이 능선 따라 산성이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아차산에서 이렇게 전망이 막힘없이 터진 곳이 숨겨 있었네요. 관계자 분 설명에 의하면 이곳이 서울의 정중앙이라고 하네요. 경복궁에서 정동진으로 이어지는 직선이 바로 이곳을 지나가고, 정동진에서 동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그 끝에 일본 황궁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입니다. 삼국시대에 이곳 산성 망루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 백제의 몽촌토성, 위례성이 한눈에 보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망대지 쪽으로 이동하였지만 망대지까지는 안내되지 않았습니다. 망대지 바로 아래가 현재 발굴현장으로 보이던데..

 

발굴 전에는 흙성으로 보여,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연계된 백제왕성이 아닐까 했는데 흙을 걷어내니 돌로 쌓은 축성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왕성은 흙덩이지 돌로 쌓지 않았다는 설명. 돌로 쌓은 성은 군사목적이었다는 설명. 성은 백제가 쌓았으나 신라, 고구려에게 패망하면서 아차산성은 신라, 고구려가 활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어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석성이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흙에 묻힌 것인지 고구려, 신라에서 흙으로 묻었다는 것인지 개인적으로 궁금증이 돋았지만, 질문은 자제했습니다. 이곳에 화재와 화공에 강한 기와 건축물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뒷받침하듯 이곳에 기와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엔 빗살무늬가 보이는데 이전에 빗살무늬의 기와가 출토되는 곳은 경주뿐이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에 삼국이 요충지를 두고 혈투를 벌인 이곳에 신라가 통일하면서 이곳에서 신리문화의 출토품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설명.

 

출토된 기와에 빗살무늬가 뚜렷합니다.

 

발굴현장에는 유적지 안내판도 세워져 있네요.

 

우뚝 솟은 망대지에 나 홀로 서 있는 나무는 상수리나무,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베어내려고 한 것을 식물학자들의 반대건의로 보존되고 있다고 하네요. 척박한 언덕배기, 망대지에서 옆으로 퍼지는 가지가 180도 수평 위로 모두 올라가 자라고 있는 아주 건강한 나무로 보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저 나무 아래를 파보면 뭐가 나올지에 초점을 두고 있는 고고학자들과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저 정도 원기 있게 자라는 나무를 함부로 자를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한 모양입니다.

 

이 벚나무는 이곳 수호목이나 다름없는 노거수인데, 베어버릴지도 모를 운명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수령 160년의 개벚나무라고 하네요. 살구, 개살구, 복숭아, 개복숭아이듯, 산벚나무에서 야생으로 자란 개벚나무라고 합니다. 서울지역의 벚나무 중 최고령으로, 식물학자들과 인근 광장동 주민들의 반대로 보존되고 있는 보기 드문 희귀종 거목입니다. 가지가 옆으로 10미터 이상 뻗으면 부러진다 해서 철봉으로 받쳐주었다고 하는데, 받쳐준 다음부터는 힘을 받아 나뭇가지가 위로 굽어 오른 것이 분명하죠. 관계자 분의 이어지는 설명에 의하면, 봄에 꽃이 피면 딱 1주일 간다고 하는 순백의 벚꽃, 꽃잎이 투명할 정도로 얇은 한겹 벚꽃인데 그야말로 너무나도 아름답다며 감탄 감탄이십니다. 봄에 오면 볼 수 있으려나..

지금은 스스로 종손목을 키우고 있어. (곁가지로 땅에서 솟아 나온 가지가 크게 자라고 있다는 말씀), 곁가지의 지름이 현재 한 15센티 정도 되지만, 

 

더 자라 한 30센티 정도 되게 굵어지면 모체는 스스로 고사되어 종손목을 키운다는 설명입니다.

 

아차산성 안내문

 

산성 발굴현장을 나와 문 잠그고, 낙타고개를 지나 고구려정까지 함께 와 고구려정 입구에 평범해 보이는 두 개의 바위를 가리키면서 지석묘를 괴었던 계석으로 본다는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별 관심 없이 지나쳤던 돌멩이 바위들이었는데 그냥 평범한 바위가 아니었네요. 관계자분은 이곳에서 인사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전망대에서 잠시 쉬면서 바라본 구리암사대교 방향 파노라마뷰입니다.

 

대성암(범굴사)을 찾아 눈길을 따라 올라가니,

코로나로 인하여 철문이 오랫동안 닫혀 있었는데 오늘은 활짝 열려 있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설법 방송도 낭랑하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대성암은 대웅전 뒤 절벽 바위에서 쌀이 나왔다는 절로 알려져 있죠.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조선조에 무학대사가 중창한 고찰이라고 하나, 문헌적 빙거를 찾기 어렵다고 안내문에 새겨져 있네요. 법당 뒤편 암천정에 암혈에서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도시 천공미(天供米)가 나와 미암(米巖)이라 부르고 미암 아래에 천연으로 된 돌확에 물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6.25 전쟁 중 전파되어 이후 재건하였으나 1992년 화재로 완전 소실, 이듬해 1993년 대웅전 신축, 1994년 삼성각 신축 단청 불사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명칭을 범굴사에서 대성암으로, 다시 범굴사로 바뀌었는지, 혼용하고 있는 것인지 안내문(사적비)에 설명이 없네요.

 

 

범종각

 

 

삼성각

 

 

 

대웅전

 

 

법당 뒤 암혈(巖穴)

 

 

 

 

풍경(風鈴)

 

대성암 전경

 

법당 앞에서 바라보이는 탁 트인 전망, 멀리 구리시, 강 건너 암사대교, 암사동,

 

노거수 느티나무

 

대성암을 둘러보고 오던 길 그대로 되돌아 하산, 아차산 설경을 따라 대성암(범굴사)까지 걸어갔다 온 거리는 5.5km입니다.

 

 

글번호: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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