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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삼남길, 의주길, 영남길 중에서 오늘은 의주길 제1길인 벽제관길을 찾아 걸었습니다. 한양과 의주를 잇는 옛길인 의주대로는 거의 원형이 보존되어 지금의 56번, 78번 등 도로로 남아 있긴 하지만, 교통량이 많은 데다 인도(갓길)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구간이 대부분이어서 도로 탐방로로 적합하지 못하여, 경기도와 고양시, 파주시, (재)경기문화재단, (사) 아름다운 도보여행 등이 함께 도보여행을 위한 탐방로를 개척, 역사문화탐방로로서 의주길을 개통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오늘은 삼송역 8번 출구 나와 걷기 출발, 벽제관이 있던 터인 벽제관지까지 걷는 코스로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걷기 아주 편한 길입니다. 나지막한 산길을 내려와 김지남 묘역을 지나 내려오면 이후, 한적한 오금천을 따라 걷다가 공릉천과 합쳐지고, 벽제교에서 대자 1교까지는 도로변 갓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후는 벽제천변 들판의 전원풍경이 펼쳐지며 둑방길을 걸어 고양동에 이르게 되고 오늘의 목적지인 벽제관지에 도착, 걷기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오늘 코스에 얽힌 이야기는 역관(驛官)에서 역관(譯館) 이야기로 이어져 매우 흥미로운데요.

 

김지남은 조선조 후기의 역관으로 만 18세인 1672년 역과에 급제한 후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외교관으로서 크게 활약한 분입니다. 특히 청나라로부터 염초제조법을 알아내어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지었고 숙종 38(1712)년에는 청나라와 국경을 획정하여 간도 및 토문강 동쪽이 조선의 영토로 하는데 기여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도록 기여하였습니다.

 

김지남은 아들 경문과 함께 중국, 일본과의 외교사를 정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편찬하여 외교사에 업적을 남겼고 역관으로서의 큰 공적을 인정받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묘역은 우봉 김 씨 문중 묘역입니다.

 

김지남의 묘소에 새겨진 비문 뒷면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게 된 과정과 의미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실록과 같은 문헌기록을 제외한 비문기록으로는 보기 드문 것으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고양시에서 향토문화재로 지정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오금천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오금천은 냇물바닥 정리를 말끔하게 해 놓아서 많이 넓어졌지만 가물어서 냇물은 거의 말라 있습니다. 오금천을 따라 달리는 자전거길은 호젓한 라이딩 코스로 인기코스여서 자전거들이 심심찮게 지나갑니다. 하늘이 맑고 시야가 깨끗하면 오금천에서 북한산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오늘은 멀리 희미합니다.

 

고양 신원동 덕명교비(德明橋碑)입니다. 비문은 오래돼 풍화에 의해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려울 정도인데, 비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한양과 그 북부지방 및 중국을 연결하는 의주길 관서대로(關西大路) 구간 중 신원동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으로 새겨 놓은 것으로, 이 비의 건립자는 이한(李澣)과 당시 고양군수인 통정대부 유후성, 정헌대부 윤면지, 이상식, 홍시우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으로 모두 힘을 모아 공릉천 위에 돌다리를 건립했고 그 명단을 새겨놓았습니다. 돌다리의 이름을 신원 덕명교라 하였고 이 덕명교비는 효종 9년에 세운 비석입니다.

 

벽제교 위에서 내려다본 공릉천입니다.

 

벽제교 북단, 테마파크 입구에 공룡이 포효하고 있습니다.

 

테마파크라 하는데 겉에서 보기엔 너무나 낡아 보이는데요..

 

 

벽제천입니다. 주변의 벽제동은 고양시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벽제라는 지명의 유래가 (1) 조선시대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죽은 후 이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시호를 사도(思悼)라 내리고 세자의 혼을 달래던 중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주위의 숲이 너무도 울창하고 골이 깊어 벽제(碧蹄)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 (2) 옛날에는 고위 관리가 길을 지날 때 "벽제"(辟除)라고 사람들이 비키도록 큰 소리로 알렸는데 이곳은 중국 북부지방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이 벽제 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을 이름이 벽제로 되었다는 설, 이렇게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벽제천 주변, 어느 농가의 허름한 창고 같은데요..

 

하늘은 파란데, 들판에 부는 꽃시샘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역관(譯館)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당시 의주로에 역관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중국으로 가는 우리의 사신들도 머물렀던 곳이죠.

 

지금의 벽제관터는 인조 3년(1625) 고양군의 관아를 옮기면서 지은 객관 자리로 일제 강점기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6.25 전쟁 때 삼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객관의 삼문마저도 무너져서 현재는 이렇게 빈 터만 남아 있습니다. 우측의 노거수 향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텐데, 궁금합니다.

 

건물은 중앙의 청사와 좌 우의 익사로 구성되었었는데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나란히 배치되었었다고 하네요. 참조 <김지남 묘비, 덕명교비, 벽제동, 벽제관지 안내문>

 

벽제관터를 둘러보고 트레일링을 마치면서 오늘 걸은 거리는 8.8km입니다. 벽제관지에서 큰길로 걸어 나가, '고양동시장' 버스정류장(19-281)에서 790번 버스로 삼송역까지 이동, 전철로 귀가하였습니다. 의주길엔 요소요소에 이정표를 세우고, 노랑, 보라색 리본을 달거나 겹화살표시 등으로 길안내가 꼼꼼히 되어 있습니다. 의주길은 스탬프투어입니다.  코스안내지도(스탬프북)는 스탬프함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친절한 배려이죠. 스탬프함의 문은 자석으로 닫혀 있는데 좀 세게 잡아당겨야 열립니다. 오늘 코스의 첫 스탬프함은 신원동 덕명교비 앞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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