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에 단풍이 붉게 물들어가는 산사풍경도 보고 천년이 넘는 세월을 담고 있는 은행나무도 볼 겸 용문사를 찾아갔습니다. 오늘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어 용문역까지는 전철로 점프, 가벼운 라이딩으로 용문역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용문로->용문산로로 이어지는 길을 '용문산관광지' 안내 표지판 보고 따라가면 되는데, 오른쪽 갓길에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지만 두 군데 고갯길에서 자전거길이 끊기어 한 2km 정도를 갓길 없는 차로를 다른 차량들과 섞여 달리는 게 좀 아쉽습니다. 그나마 단풍행락 차량이 많아서 차량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서행하는 것이 불안감을 조금 덜어준다고 할까요, 오늘 용문역-용문사를 왕복한 라이딩 거리는 약 19 km 밖에 안되지만 두 군데 고갯길이 길어서 만만찮게 힘들게 하네요. 길가의 은행나무(가로수)는 은행잎이 다 떨어져 자전거길에 수북이 쌓여 있어 타이어가 지나가면서 은행알 터지는 소리가 파박 파바박 따다닥 거리는데 은행잎에 자전거 타이어가 미끄러지지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용문사 경내에 들어오니 공기는 더 쌀쌀한데 대웅전 앞 천년 노거수 은행나무는 노란 은행잎이 많이 안 떨어지고 아직은 절정인 듯합니다. 오늘 본 용문산의 단풍은 울긋불긋 화려하지 않은 은은한 색감의 한국화 풍경입니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 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하네요.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습니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현왕후 심 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습니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 찔러 태워버렸습니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를 중건하였고,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천, 관음천,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과
미륵불을 조성하였습니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용문산은 기암괴석 고봉준령의 태산으로서 가섭봉 봉우리에서 바라보면 푸른 물결이 파도 치듯하고 푸른 비단으로
수놓은 듯한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명산에는 여러 사찰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1천2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용문사, 상원사가 있으며, 목은 이색이 쓴 대장전기가 있고 흔적만 남아있는
윤필암은,
이색이 왕의 뜻을 받들어 나옹(懶翁)의 부도명(浮屠銘)을 지었는데 나옹을 따르는 문하가 윤필물(潤筆物)을 사례로
주었으나,
이색이 받지 않고 폐사(斃寺)를 중수토록 하여 윤필암이라 하였습니다.
흔적도 알기 어려운 죽장암은 개현 스님으로 인하여 암자에 머물면서 도를 깨달은 이가 있었으나 이름은 알 수 없었고
왕으로부터 대나무 지팡이를 하사 받고,
죽장암이라 하였으며 왕은 죽장암 편액을 내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암자가 높은 곳에 있어 용문산 심장에 있다
하면 상원사는 무릎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나무가 울창하여 앞을 굽어보면 치악산과 여강(驪江)이 손바닥 가운데 있는 듯하고 산봉우리들이 나직이 읍(揖)을
하는 듯하여 온화하며 사시(四時)의 경치가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변화무쌍한 곳입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감흥하기 위하여 조선조 5 백년사에 수많은 명현(名賢), 명사가 이곳을 찾아 자연의 풍치를
찬미하는 시를 남겼습니다.
그들 옛 한시를 해역 하여 옛 정서를 되새기게 하고 오늘의 풍경을 옛 시정으로 감동케 하기 위하여,
시문을 돌에 새기어 세워놓은 것은 새로운 명소로서 이곳을 찾는 분들의 쉼터가 되고,
역사성을 일깨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양평군수 김선교는 성심하고 의지로써 시비를 세우게 하였으며 시비의 시화선(詩畵選)은 한시양평명감에서 골랐으며,
시편은 목판 영인본의 시로 하였으며 시선은 양평인물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0호로 1962년에 지정된 은행나무입니다.(높이 42m, 둘레 14m, 수령 1,150년 추정되는 암나무)
한국의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 경순왕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리의 고승
의상대사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란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를 면했는데요,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고 할 정도로 신령스러운 나무로 인식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세종조 때는 정삼품보다 더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 받은 명목(名木)이기도 합니다.
시비(詩碑)에는 조선조 시백의 작시로 정하고 해역은 야은 홍정표가 하였으며,
고려대 국문학과에서 교열(校閱)하고, 향사연회(鄕士硏會)에서 교합(校合)하였습니다.
필서(筆書)는 저명(著名) 필명(筆名)이 하였으며 양평군에서 후원하고,
양평문화원 용문분원과 향사연회에서 주관하여 시비를 세웠습니다.
이상 자료참조 <용문사 홈+한시수비기(漢詩竪碑記)>
글번호: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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