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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백암리에는 나지막한 산인 방화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 능선 따라 산성터가 남아 있기도 하고, 기미년 3.1 운동 당시 백암리 주민들이 모여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친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 충무공이 무예를 연마한 곳도 이곳이고 혼인하여 살 던 곳도 이곳이어서 현충사가 당연히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오늘 코스는 공이 충무의 정신을 갈고닦은 방화산 산길을 먼저 둘러보고 내려와 이순신기념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아산들레길에서는 방화산 산길을 '현충사둘레길'로 명칭을 달아놓았네요. 
 

현충사 주차장입니다. 온양온천역 앞 정류장(신한은행)에서 970번 버스에 승차, 오는 동안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거의 한 시간 만에 현충사주차장에서 하차, 많은 탐방객들이 찾아와  주차장은 거의 만차네요.  한가운데 표지석이 보이죠, 다가가 보면, 
 

장군이 남긴 명언, 불굴의 임전무퇴 가르침을 여덟(8) 글자에 담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친필이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현충사둘레길

 

공원 잔디밭 쉼터 옆 느티나무에 붙여놓은 현충사둘레길 길안내 화살표, 그대로 보고 충무교육원 가는 방향으로 따라갑니다. 순환코스를 시계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이죠. 골목길 굽이굽이 코너마다 길안내 화살표가 붙어 있습니다.  
 

둘레길 이정표 말뚝에 국궁모양의 조형물이 이채롭죠. 
 

길바닥에 그려놓은 '걷쥬, 아산둘레길' 스티커에 진행방향을 표시한 발자국이 재밌네요.
 

우측에 충무교육원을 끼고 오르막 산길을 올라 방화산 숲길에 진입, 
 

산길엔 소나무, 참나무, 굴참나무, 아카시아나무들이 뒤섞여 있는 걷기 좋은 흙길입니다. 우측에 현충사 경내에는 명품 소나무들로 가득합니다.
 

밤송이들이 뒹굴고 있는 밤나무길도 지나고, 콩밭 지나 만나는 이정표에, 
 

우측 화살표 따라 현충사로 내려가면 짧은 코스가 되겠죠. 그런데 이정표에 좌측으로 직진하라는 둘레길 화살표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없네요. 일단 꾀꼬리성, 물한산성 가는 길로 왼쪽으로 진행,
 

오르막 산길이 점점 가팔라지면서  서두르면 숨 차오르는 구간입니다. 
 

 
산길에는 보라색 꽃향유가 많네요.
 

우측으로, 백암 1리 경유 현충사주차장 가는 쪽으로 진행,
 

 
은행나무군락지네요. 노랗게 물들고 있습니다.
 

 
아까 970번 버스 타고 오면서 곡교천 은행나무길을 지나왔는데요, 아직 이만큼 물든 은행나무도 안보이던데요. 곡교천엔 11월 하순은 되어야 황금빛 절정이겠습니다. 
 

산길에 쑥부쟁이도 여기저기 무리 지어 피어 있습니다.
 

 
단양, 제천, 남한강 물줄기 주변에 주로 서식하는 멸종위기 2급 식물인 쑥부쟁이가 온양의 야산에서도 보이네요. 
 

산불감시초소입니다. 정상 고도 153m(gps),
 

정상의 산불감시초소 바로 밑에 설치되어 있는 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그 뒷면에는 '1919년 3월 31일 밤 8시 김복희 등 염치 백암리 주민들이 봉화만세시위 전개'하다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두(2) 분은 역방향으로 산길을 돌고 있네요.
 

 
억새꽃이 무성한 구간입니다.
 

왼쪽으로 백암 1리 경유, 현충사주차장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1919년 3월 31일 유관순과 같이 이화학당에 다녔던 김복희와 백암교회 부설 영신학교 교사 한연순의 주도로 주민 50여 명이 이곳 방화산에서 시위를 벌였다는 안내문이 정상의 만세시위 표지석과 동떨어진 이곳에 세워져 있네요. 그 해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아산지역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백암리산성 둘레가 380여 미터의 퇴메식 산성이었다는 설명입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 
 

백암리 마을입니다. 
 

마을 앞 황금들판,
 

'걷쥬 아산 둘레길' 스티커를 따라 백암리 마을을 지나 현충사 주차장에 도착, 둘레길을 마치고 현충사에 입장(무료입장),
 

충무공 이순신기념관

 

충무공은 이곳에서 10년 동안 무예를 연마하여 32세(1576 선조 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순국한 지 108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년) 이곳에 충무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현충사라고 사액하였다는 설명입니다. 현충사라는 명칭은 근세에 지은 것이 아니었네요. 그런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다니 황당하기도 합니다. 
 

숙종 임금이 내린 편액 현충사
 

이순신기념관입니다.
 

숙종 임금 대에 세운 현충사는 지금의 충무교육원 자리였네요. 교육원에 들려볼걸, 아까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갔네요.  
 

순국하신 1598년에 우의정, 1604년에 좌의정, 1793년 정조 대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대인 1643년에 내려졌네요. 
 

공이 명나라 장수로부터 받은 선물로 추정되는 유품으로,  
 

요대(관복의 허리띠), 복숭아 모양의 술잔과 잔받침, 옥로(갓 장식품으로 옥으로 만든 연꽃잎에 쌓인 해오라기 세 마리)
 

충무공은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인현동에서 태어나셨네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 좌의정 유성룡의 추천을 받아 47세에 전라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으니, 이런 파격이 전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공은 효성에, 인성을 두루 갖춘 인품에 수많은 유명, 무명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될 수 있었다는 풀이입니다.
 

충무공의 영정
 

임진란 6년 전인 42세에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도 조정으로부터 백의종군의 명을 받았네요. 
 

임진일기, 계사일기, 병신일기 등 일기를 쓴 연도에 따라 이름을 붙였으나 정조 대에 이충무공전서를 간행, 난중일기라 명명했습니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달필이셨네요. 
 

일곱(7)권의 일기
 

 

부산진이 하룻만에 함락되었네요.
 

바닥에 흘러넘치는 바닷물 영상이 너무 실감 나 물에 빠질 듯 조심해서 밟고 건너게 되던데요.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왜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조선이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임진왜란은 7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조정의 출동명령을 무리하다고 보고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갖은 고초 끝에 2차 백의종군이 시작되었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극형에 처할 의지가 확고하였다고 설명되어 있네요. 그런 임금이었는데 대왕칭호까지 붙은 건 무슨 연유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당시 왜군은 전투를 위한 조직보다는 수송부대에 가까워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이 주 역할이었다는 얘기는 잘 납득이 안 되는데요. 선공으로 들어오는 침략군이 전투력보다는 수송력에 중점을 두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전술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데요.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좌 우에 모두 14개의 총혈 포혈을 갖추고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충무공의 후예임을 다짐하는 우리의 해군
 
참고로,
 

이순신의 백의종군길, 한양을 떠나 남태령을 넘어 삼남길을 따라 내려와 아산지역의 백의종군길입니다.
 

이순신 순국제전이 내달 2일과 3일에 걸쳐 펼쳐집니다.
 

현충사주차장 정류장에 부착된 970번 버스 시간표, 60분 배차후, 30분, 30분 다시 같은 패턴의 배차시간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970번은 온양과 천안을 왕복하는 버스노선입니다. 14분 기다려 970번 버스에 승차, 40분 만에 온양온천역에 하차, 1호선 환승 귀가하였습니다. 
 

온양온천역 앞에 자전거 대여소는 23년 1월 1일부터 운영이 중단되어 있네요. 
 
오늘 방화산 현충사둘레길을 걸은 거리는 6.3km입니다.
 
 
 
글번호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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