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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공원을 출발점으로 하는 코스가 몇 번 있어서 찾아왔었으나 출발점이다 보니 시간에 쫓기어 코스에 진입하려는 조급함에 공원을 한번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었죠. 오늘도 코스 따라 출발하고 나면 문득 서호공원을 다시 찾아올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늘은 다는 못 돌아보아도 그중 일부인 꽃뫼공원(꽃동산)은 찾아가 지금 활짝 피어있는 꽃들과 눈 맞추고 아름다운 꽃표정을 사진에 담고 나서 오늘의 코스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서호공원의 꽃구경 먼저하세요.

 

홍띠와 노란 금계국,

 

참억새 리틀키튼

 

톱풀

 

상록패랭이

 

리아트리스

 

루드베키아

 

펜스테몬

 

참억새 롯츠실버

 

보리

 

에키네시아

 

엉겅퀴

 

리시마키아

 

이름표가 안 보여요..

 

꿀풀

 

털수염풀

 

황금조팝

 

섬기린초

 

서호에 가마우지가 많다고 하지만 오늘 물가운데 인공섬을 살펴보니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요. 인공섬은 가마우지 떼의 낙원입니다.

 

가마우지는 대개 얕은 냇물에서 먹이를 잡아먹는 것 같은데 수백 마리 아니 천여 마리도 더 되어 보이는 무리들이 서호 깊은 물에서 어떻게 먹이를 잡아먹는지 궁금해지네요. 이 많은 녀석들의 배설물로 인공섬에 아카시아나무를 비롯한 초목들이 허옇게 뒤덮인다고 하는데요. 서호를 끼고 있는 여가산은 해발 50여 미터의 자그마한 야산으로 중백로, 쇠백로, 해오라기, 황로, 왜가리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백로 서식지가 대개 농촌지역인 것에 비해 여가산은 도심지와 가까움에도 이들의 서식지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서호와 서호천에서 활발한 먹이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백로는 2 급수 이상의 깨끗한 물에서만 먹이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만큼 서호와 서호천의 자연환경이 우수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축만제 표지석입니다. 축만제는 정조 23년(1799), 화성의 서쪽 여가산 아래에 당시로서는 최대의 크기로 조성된 저수지입니다. 이에 앞서 정조는 1795년에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萬石渠)를, 1797년에 화산 남쪽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만년제(萬年提)를 축조했는데 대규모 수리시설과 둔전 개간에서 크게 성공하자 정조는 만석거와 만년제의 3배 규모에 달하는 축만제를 조성하여 개간된 둔전에서 얻은 수익은 화성을 수리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축만제의 가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16년 11월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의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축만제 수문 앞에 항미정이 보입니다.

 

항미정은 축만제 서호에 있는 정자로 순조 31년(1831)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다고 하네요. 항미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詩句)에 "서호는 항주의 미목(眉目) 같다"라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지었다고 하는데 항주를 대표하는 절경인 서호(西湖)가 서시(西施)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한 데서 유래된 것이죠. 서시는 중국 월나라의 미인으로 평소 지병이 있어 항상 상을 찌푸리고 다녔는데도 미모가 출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여인들이 너도 나도 찡그리고 다니자 자기 분수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 하는 여인들을 비웃었고 여기서 찡그릴 빈(嚬) 자와 쭈그러질 축(蹙) 자를 써서 빈축(嚬蹙)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항미정의 구조는 ㅡ자형 4칸과 전퇴(前退=집채의 앞쪽에 달아 낸 칸살=칸을 나누는 살)가 있는 건물을 기본구조로 하고 서쪽으로 2칸의 공랑(公廊=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지어 빌려준 가게)을 붙였고 동쪽으로 1칸의 마루칸을 내어 달았습니다.

 

항미정은 1908년 10월 2일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수원 능행을 하였을 때, 융건릉 참배 후 서호 임시정거장에 도착하여,

 

축만제 둑방길을 지나 항미정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던 유서 깊은 정자이기도 합니다.

 

서호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서호천의 호젓한 산책길입니다. 이 길은 수원팔색길의 1색인 모수길과 함께 합니다.

 

냇물은 폭이 좁고 수량은 많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데 길가에 나무들이 커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 좋은데요.  

 

서호천 산책길은 배양교까지 오르막 내리막이 없이 이어집니다. 전구간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좋은 평탄한 길입니다. 중보교부터는 수원둘레길과 겹칩니다.

 

수인선 옛길입니다. 수원과 인천을 잇는 옛 철도로 수여선(수원-여주)을 인천항까지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 철길이었습니다. 서해바다에서 난 풍부한 소금이 바로 수인선을 타고 내륙지방으로 수송되었고 내륙의 곡식은 수인선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민족적 아픔이 서려있는 철도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자전거길인 이 길이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의 협궤열차가 달리던 수인선으로 철길은 1996년 12월 31일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중보들공원->수원비행장을 지나면 다시 들판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 넓은 들판이 중복들 들판입니다. 중복들길은 고색동 인근의 지명인 중복들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에는 중보가 있다 하여 중보평 또는 중보들이라고 불려 왔는데 평동이라는 지명 역시 평야와 관계되어 붙은 이름으로 보입니다. 서호천 아래에 물이 풍부한 너른 벌판 가운데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데서 예부터 벌말, 들말, 평리 등으로 불렸고 그것이 지금의 평동이라는 이름이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로들이 논 가운데서 먹이잡이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다리가 방금 지나온 배양교입니다. 우측에 보이는 냇물은 황구지천이고요. 삼남길 제5길 중보들길은 배양교에서 끝나지만 이어지는 제6길을 따라 계속 걸어 용주사까지 가기로 목적지 변경하였습니다. 그런데 배양교 근처에 제6길 안내판은 안보입니다. 다리를 새로 놓으면서 망실된 것 같은데 곧 새로 만들어 세워놓겠지요, 지금은 다리 난간에 리본만 매어져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1939년 혜화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조지훈은 용주사에서 큰 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용주사를 찾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승무를 보게 된 조지훈이 그 시상(詩想)을 주옥같은 시어(詩語)로 담아내어 바로 그 유명한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시(詩), "승무(僧舞)"가 탄생되었습니다.

 

동종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현경왕후),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6번의 재를 올렸는데 일제 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6월 100년 만에 사도세자 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護聖殿)의 현판을 제막하여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였습니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는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용주사 오 층 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212호)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보고 있습니다. 참조 <삼남길 이야기 안내판 - 서호 가마우지, 축만제, 항미정, 수인선, 중복들, 용주사, 승무>

 

스탬프함은 사천왕문을 지나 들어와 왼쪽 울타리 쪽에 다소곳이 서 있습니다. 용주사 앞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오늘의 트레일링을 마치고, 35-1번 버스로 병점역으로 이동, 전철로 귀가하였습니다. 화서역 6번 출구에서 나와 걷기 출발, 서호공원->용주사까지 오늘 걸은 거리는 13.1km입니다. 

 

이정표가 훼손되고 있습니다.

(위) 벌말교 지나 둑방길로 올라 걸어오다가 서호천 산책길과 다시 합쳐지는 곳에

세워졌던 삼겹화살표 안내판이 뽑혀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대로 따라가면 차도로 나가 코스이탈하게 됩니다.

(아래) 서호천길에서 중보들공원 방향으로 우측으로 꺾기 직전,

배양교 2.92km 전방 이정표는 그대로 뽑히여 풀숲에 버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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