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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웅진백제의 25대 왕 무령왕릉에서 되살아난 찬란한 백제문화 

 

2015년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8개 백제의 유산을 묶어 등재된 것인데 그중에 공주 무령왕릉과 공산성이 포함된 것이죠. 그런데 왕릉은 우연히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돌방무덤인 5호분과 벽돌무덤인 6호분에 습기가 차고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봉토 북쪽으로 배수공사를 하던 중 작업하던 인부의 삽자루 끝에 무엇인가가 걸려서 조심스레 파내려 가다가 가지런히 쌓인 벽돌을 발견, 배수공사는 즉시 중단되었습니다. 발굴단장과 박물관장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이 무덤은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묘라는 것과 묘비석이 존재한다는 것, 도굴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무덤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묻혀 있던 찬란한 백제문화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다음 날 무려 5,200여 점에 달하는 화려한 유물이 수습되었습니다.

 

무덤 속에 마련된 전시관으로 입장하여 찍은 사진들을 모아 아래 1분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1,500년 전 고대국가인 백제문화를 되살려 낸 역사적 사건이었고 왕의 무덤이라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웅진기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며, 새로운 백제사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평가입니다. 

 

 

(2) 공산성은 웅진도성 안에 있었던 왕성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패해 개로왕이 참수되자 패퇴한 백제가 한성 위례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의 왕성으로 공산(公山)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요새로 성벽의 둘레가 2,660m로 웅진성으로 불렸습니다. 웅진(熊津)은 지금의 공주(公州)죠. 그러다 고려시대에 공산성,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습니다. 웅진에서 60여 년 후 후에 백제가 다시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한 후에는 공산성은 제2의 도성으로 기능을 하였습니다. 사비성 궁궐을 수리할 때 무왕이 5개월 동안 머무르기도 하였고 조선의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던 왕성이죠. 마지막 군주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을 하였으나, 웅진성의 방어를 맡은 방령(方領)이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에 넘기면서 백제는 멸망하였는데 그는 당나라에서 큰 벼슬을 받았다고 하네요. 군주의 최측근이 등 뒤에서 비수를 꽂았네요. 반복되는 모반의 역사입니다. 

 

북문인 공북루 인근에 일반인들이 거주하던 공간이 있었는데 성안마을이라 하였습니다. 이 부지에서 주거지, 건물지, 우물지, 공방 등이 발굴되기도 하였네요. 성 안의 네(4) 개의 문지(門址) 중, 성의 정문인 금서루(錦西樓)를 중심으로 돌아보고 내려왔습니다.

 

 

 

 

 

 

네(4) 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인 지금의 금서루는 1993년에 복원한 것이네요.

 

금서루는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문헌 기록에 따라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성벽에 휘날리고 있는 깃발은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그대로 다라 재현한 것으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는 설명입니다.

 

 

금서루 성문(城門)

 

 

성벽에 휘날리는 깃발

 

 

성벽 중 가장 높은 지형으로 언덕에 망루가 있었을 것 같은데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금서루의 성문이 위아래 2층문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네요. 

 

금서루의 뒤편

 

공산정(公山亭)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현재 수리 중,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한 바퀴 돌아볼 수가 없어 아쉽네요.

 

금서루에서 돌아내려 왔습니다.

주차장으로 이동, 대기 중인 버스에 탑승, 귀가하였습니다. 

이 포스팅은 마곡사 - 무령왕릉 - 공산성의 코스로 진행되어 10월 20일 별도로 포스팅한 마곡사 투어에 이어진 당일 후속 투어입니다. 참조: 천년고찰 마곡사는 보물단지(글번호 1032)

 

글번호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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