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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동에서 오르는 남한산성 옛길 이야기길 서문길

 

하남시 감이동(374-9)에서 7번 스탬프 찍고 남한산성 서문 (우익문)을 향해서

오르막 산길을 오르면 바로 가파른 오르막 시멘트 계단길을 만나게 됩니다. 계속 오르막인데,

 

오르막 길에 긴 콘크리트 계단, 끝에 두 사람,
오르막 돌계단 길, 우측에 매트 깔린 돌길, 끝에 세 사람,

 

이어지는 길은 다시 가파른 오르막 돌계단으로 이어집니다. 남한산성 옛길 이야기 길 중, 가장 가파르고 힘든 코스인 서문길을 오르막 코스로 오르기로 하고 마천역에서 내려 걷기 출발했습니다.

 

끝없이 길어 보이는 오르막 돌계단 길, 양 옆에 안전 로프 두 줄, 앞 쪽 긑에 흰 옷 입은 한 사람, 주변은 울창한 삼림,

이 가파른 돌계단은 한 200개쯤 되나 봐요.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인데,

숨을 몰아쉬면서 오르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리막 코스로 잡고 쉽게 쉽게

걸어 내려오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삼각뿔 모양의 돌무더기

여기 돌무더기에서 오른쪽으로 100m만 오르면 서문입니다.

 

남한산성 서문

 

웅장한 성곽 위에 서문 누각

서문(우익문)입니다. 이야기가 얽혀있는 남한산성 옛길, 오늘 서문길에서 만난 이야기는 호랑이 이야기입니다. '산성의 길 안내하는 호랑이' 설화에서는 호랑이가 수호신인 이휘 장군의 사당까지, 길을 잃은 마을 주민을 안내하기도 하였다고 하네요. 마치 산신령의 곁에서 마을을 지키는 호랑이 신(神) 같았습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고 경외의 대상이었던 호랑이는 멸종하고 말았는데,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 살고 있는 대형 육식동물을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유해동물을 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남획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서문 철옹성 성곽

1915년부터 1942년까지 일제는 호랑이, 표범, 늑대 같은 대형 육식동물을 연인원 수만 명씩 동원하여 포획하였고 결국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남한산성과 인근 지역 주민들의 호랑이 목격담이나 제보도 이 시기에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서문 홍예문(아치형), 열려 있는 철문,

서문을 지나 이야기는 산성리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조선시대 한양은 2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큰 도시였습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시기에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비교해 보면 그 당시에 한양이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이 지나는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였는데 토박이 주민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산성 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시쳇말로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행궁

 

서문에서 북문을 지나 행궁에 들어왔습니다. 다시 산성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조 6(1627)년 광주부의 읍치(邑治=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의 인구는 폭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1895년 갑오경장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주 유수부가 폐지되고 1914년 총독부에서 행정구역 통폐합까지 하면서 산성리는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규모가 서서히 줄어들게 됩니다.

 

행궁 마당에는 많은 관광객들, 수문장 복장을 입은 사람, 한복을 입은 사람, 포졸 복장을 한 사람,

일제에 의해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던 광주군청이 경안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군사 및 행정도시로서의 위상은 완전히 사라지고 여기에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며 주요 도로가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되어 근대화 발전 대열에서 소외되기 시작하면서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쇠락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게 됩니다.

 

화려한 단청, 아름다운 돌담, 로 앵글 사진, 희미한 하늘,

 

아름다운 기와지붕, 돌담(꽃담)

행궁을 둘러싸고 있는 꽃담이 참 아름답습니다.

 

행궁 옆 잔디 광장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특수 목적에 따라 행궁을 건립하였는데, 몇몇 행궁은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지어졌습니다. 강화, 광주, 양주, 전주행궁이 그 예로 이들 행궁은 왕이 전란을 피해 국정을 돌볼 수 있게 하고 선대 임금들의 영정과 왕실 일가를 보호하며 왕실의 귀중한 물건과 문서들을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잔디 광장에 산책하는 쌍 쌍 2+2, 노거수 느티나무 두 그루,

남한산성의 광주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머물며 항전한 곳입니다. 그 외에, 임금의 이동은 질병 치료나 휴양을 위해서도 이루어졌는데, 이를 위해 온천이 있는 온양, 이천, 고성과 초수(椒水: 냄새가 후추와 같고 씻으면 안질이 낫는다는 물)가 난다는 청주, 목천, 전의에 왕의 휴양을 위한 행궁이 건립되었습니다.

 

잔디 광장에 붉은 용포, 왕과 왕자의 복장을 한 두 사람, 걸어 올라오고 있음,

남한산성의 행궁은 다른 행궁과는 달리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 2(1624)년 7월에 착공하여 2년 4개월 만에 완공하였습니다. 인조 14(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 항전하였습니다.

 

푸른 명품 소나무들,

잘 보존되어 오던 행궁은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는데 1919년 행궁에 있던 좌승당을 경안리로 옮겨 경찰서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산성은 2007년 6월 사적 제480호로 지정.

 

행궁 전경, 앞쪽의 풀밭엔 하얀 들꽃

 

사찰(절)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남한산성에는 사찰이 참 많은데요,

장경사, 망월사, 동림사, 옥정사, 개원사, 한흥사, 남단사, 천주사, 국청사, 영원사 등 절이 10개나 있습니다.

 

풀밭에 잡초, 들꽃, 은행나무, 노거수 느티나무,

호국불교의 성지라는 신앙적인 측면과 함께 절이 많았던 또 하나의 실질적인 이유는, 바로 승군의 편성 때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스님들은 활인검을 들고 의병들과 함께 큰 활약을 했는데..

 

노거수 느티나무, 클로즈업,
노거수 느티나무 클로즈업, 아름드리가 넘는 굵은 줄기에 반쪽은 시멘트로 채워져 있음. 옆으로는 길게 이어지는 돌담,

 

임진왜란이 끝나고 인조는 남한산성을 축성하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을 조직적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그 결과 남한산성에 많은 사찰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8도 승병들의 주둔지로 8개의 사찰이 배치되었고 총괄본부의 역할을 하는 사찰이 하나 추가되어 총 9개의 사찰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늦게 창건한 영원사는 제외)

 

노거수 느티나무, 로 앵글, 뒤로 행궁, 돌담, 희미한 하늘,

 

남한산성 숲을 지켜온 금림조합 이야기

 

다음 이야기는 남한산성에 숲을 지켜온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남한산성의 산림은 매우 잘 보존되어 온 아름다운 생태유산입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숲을 보호하고자 하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서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이곳 삼림이 지금처럼 울창하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대체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당시 대부분의 산들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던 것에 크게 대조적입니다. 금림조합은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감 (山監: 산림감시원)을 50명이나 선출하여 매일 6명씩 교대로 해 산림을 감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도록 하여 숲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취약계층의 구제에도 도움을 주는 요샛말로 복지정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닭죽 이야기

 

마지막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 닭죽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남한산성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주민들은 장사도 잘 안 되는 변화의 시기에 스스로 새로운 생계수단을 모색해야 했는데요, 그런 와중에 남한산성은 수려한 자연환경과 유서 깊은 역사문화 자원을 가진, 서울에서 멀지 않은 놀러 가기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남한산성은 관광지로 주목받게 되면서 주민들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음식장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특히 쉽게 잡아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닭죽, 닭백숙 등의 음식이 인기를 끌게 되고, 점차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남한산성이 숲과 계곡을 즐기며 먹는 닭요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남한산성의 40년 전통의 닭죽 이야기입니다. 오늘 소개한 이야기들은 남한산성 옛길 이야기 안내문을 참조하였습니다. 

 

마천역(1번 출구)->감이동(스탬프)->서문-> 북문-> 행궁에서 트레일링을 마치면서 오늘의 걸은 거리는 8.1km입니다. 이렇게 해서 남한산성 옛길 전 코스를 완주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센터)에 들려 완주자 명부에 등록하였습니다. 근무자 말로는 센터에서 추후 연락이 갈 거라고 하네요, 무슨 연락이 올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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