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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으로 오르는 길 옆 종각의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 cm, 입지름 100 cm로

 

 

몸체에 새겨진 명문 '성거산천흥사종명통화이십팔년경술이월일(聖居山天興寺鐘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에 따르면

 

 

고려 현종 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고려 태조 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천안시 천흥사에 있었는데, 언제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왕가 박물관으로 옮겨지고 해방 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동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종은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되 울림을 좋게 하기 위해 크기를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한 복제된 종입니다. 참조 <천흥사 동종 안내문>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으로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투지로 전승문이라고 하였다고 하네요. 그러나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으로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습니다. 참조 <전승문 안내문> 하남 광주향교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보니 험한 산세에 청나라 군사들이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 같아

 

 

보이기도 하네요. 남한산성옛길 안내 리본을 보니 반갑네요, 아는 길에도 이런 리본을 보며 걸으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죠, 그런데 전 구간에 딱 3장뿐이 안보였어요. 나무가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 계곡엔 철조망이 쳐져 있어 내려가 볼 수 없지만 엊그제 내린 비로 물 흐르는 소리는 경쾌합니다.

 

 

이 길은 위례둘레길 코스와 겹치면서 역사문화 이야기가 얽혀있는 탐방로이기도 합니다. 가파른 나무계단길을 내려가면서 먼저 만나는 이야기는 마패이야기입니다. 공무여행을 하는 관리들이 발급받은 마패를 제시하면 지친 말을 새 말로 바꾸어 주었는데 마패의 한 면에는 탈 수 있는 말의 수가 새겨져 있고 다른 면에는 연호와 상서원인(尙瑞院印)이 새겨져 있습니다. 긴급한 경우 수시로 말을 지급하는 수시급마(隨時急馬)라는 규정도 있었습니다. 능행차가 있는 경우 왕의 제사물품을 운반할 때나 각 진영의 대장, 역관, 징병장교인 압공인에게 말을 내주었습니다. 수시급마 규정은 결국 역마를 남용하는 폐단을 불러 역마제도가 문란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패를 분실하거나 파손하면 곤장 90대에 2년 동안 걸어 다녀야 하는 형벌이 내려졌다고 하네요.

 

 

계속 내리막 계단길인데 숨을 몰아쉬며 거꾸로 오르막으로 올라오는 분들도 많네요. 이야기는 마차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공무로 여행 중인 관리는 역참에서 말을 빌려 이용할 수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말을 사사로이 이용하거나 무단으로 이용하는 폐단이 늘고 비용문제로 인하여 역참 자체의 운영이 곤란해지면서 말의 수급이 불안정해지게 됩니다. 물류를 운송하는 경우 바퀴 두 개 달린 소달구지가 아닌 바퀴 네 개가 달린 마차를 소가 끌도록 하였습니다. 말이 끌어도 되고 소가 끌어도 되는 수레였지만 본래 말이 끌던 마차였기 때문에 소가 끌어도 마차라고 하였답니다.

 

 

상사창동의 연자마(방아)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8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세미(稅米)길로 이어집니다.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전국 각지에서 거둔 세곡, 군량미, 둔전세 등을 둔지나루와 창모루에 하역하여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마차, 소, 등짐을 이용하여 골짜기에 있던 상사창, 하사창으로 운반 보관하였고, 여기에서 다시 등짐으로 산비탈을 올라 산성 안의 여러 창고로 옮길 때 다니던 이 길을 세미길이라고도 하네요.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조선의 길인데요, 조선은 당시 중세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던 바 조선의 대외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한마디는 바로 사대교린(事大交隣)으로 명나라를 우러르고 다른 민족과는 교제를 한다는 의미로, 조선은 해양이든 대륙이든 외부로의 진출에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외부와의 투쟁에서 소극적이었던 조선, 반면에 주변 세계의 정복에 적극적이었던 로마제국, 이렇게 두 민족의 세계관의 차이는 두 민족이 가지고 있는 좁은 길과 넓은 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옛길에서는 금연, 자전거 진입금지, 취사행위금지(과태료 30만 원), 양봉장에는 차량통행금지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땅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의 토지규모는 보통 결이라는 단위를 사용했는데 이는 토지의 소출량에 따른 상대적 분류이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남한산성 내의 토지규모가 124 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현재의 미곡단위로 환산해 보면 남한산성에 속한 토지에서 1년간 생산되는 곡식은 22톤으로 매우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모민정책으로 4천여 명의 주민이 살아가기 시작한 인조 이후에는 더욱 부족하게 되어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수급하면서 남한산성이 상업의 중심지가 되고 소비도시화 되었던 것입니다. 연자마에서 향교까지는 덕풍천변을 따라 걷게 되는데, 차로 옆 자전거길을 걸어도 좋습니다. 덕풍천은 지금은 졸졸 흐르는 개울이지만 얼마 전에 수위가 3 m 정도는 올라갔던 듯 휘청 휘어진 나뭇가지 끝에 급류에 쓸려 내려가던 수초가 한 줌씩 뭉쳐 매달려 있네요.

 

 

하남 광주향교는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네요, 평일에만 개방되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미리 신청한 단체(10인이상) 관광객에게만 개방이 됩니다. 이곳에는 수령 480여 년 정도 되는 노거수 은행나무가 대여섯 그루나 되는데 은행알은 많이 떨어져 있지만 잎은 아직도 푸르네요. 은행잎이 곧 노랗게 물들 텐데 그때 이곳 가을풍경이 절정이겠어요.  다음 이야기는 남한산성의 인구이야기입니다.

 

 

당시 조선은 남한산성 내 거주할 인구를 모집하였는데 모집한 호구수는 300여 호였으며 이들에게는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기로 합니다. 부역과 세금면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산성으로 모여들어 호구가 1000여 호에 이르게 되자 숙종 17(1691)년에 모민정책을 폐지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주민 약 4,000여 명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300 여 년간 북적거리던 산성마을 주민들은 광주유수부가 폐지되고 읍치의 위상을 잃게 되자 마을을 떠나기 시작하게 되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200여 명의 주민들은 여전히 산성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오가던 길, 물건을 이고 지고 장터와 장터를 오가던 보부상, 장돌뱅이들의 애환이 서린 길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녹아 있는 옛길이 자동차길로 내어주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쌓아온 삶의 흔적이 지워지고, 몇천 년을 유지해 왔을 서낭당과 장승에 대한 토속신앙이 묻히고, 역참과 마방이 사라지고, 의병들의 기억이 잊혀지고 있는 등등 모든 것들이 추억스럽습니다. 참조 <옛길 이야기 안내문> 

 

 

오늘의 걸은 거리는 8.5 km입니다. 산성역에서 내려 버스로 이동, 산성로터리 주차장에서 내려 걷기 출발, 북문을 지나 산길을 내려와 연자마, 광주향교에서 스탬프 찍고, 마을버스로 서울로 이동하였습니다. 향교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서울방향 버스는 둔촌역(종점), 잠실역(종점) 가는 2개 노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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