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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나와 1020번 버스를 타고 두세 정거장 가는데 버스 기사님이 오늘은 교통이 막혀 있어서 자하문고개로 갈 수 없다면서 경복고 입구에서 하차토록 하였습니다. 좀 의아했지만 내려보니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길 양편에 경찰버스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고 가운데로 간신히 차량들이 교행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한 연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어느 노동단체에서 근처에 시위가 예정되어 있어 경찰병력이 출동해 있는 듯해 보였습니다. 자하문고개까지 약 1.2 km 구간에 경찰버스와 시위대들이 타고 온 버스들을 정차해 놓고 시동은 끄지 않아 비가 내릴 듯 꾸무럭거리는 날씨에 길가에 널리 스민 매연을 맡으며 고갯마루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고개에는 왼쪽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고, 도성길은 조금 더 올라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오르는 계단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입니다. 올라가 보면 언덕의 큰 바위에 윤동주의 대표 시 "서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시절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그가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을 떠 올렸을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였다고 하네요.

 

인왕산 성곽길로 접어들면서 가파른 돌계단을 힘들게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치마바위입니다.

 

기차바위죠, 지나온 성곽길을 인왕산 정상(340m)에서 뒤 돌아본 사진입니다.

 

인왕산 정상입니다. 인왕산은 큰 화강암 덩어리의 바위산으로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험준한 돌산입니다.

 

정상에서 범바위 쪽으로 내려가는 돌길이 무척 가파릅니다. 로프줄도 잡고, 나무기둥도 잡고, 엉금엉금 기듯이 해서 바닥에 돌도 붙잡고 하면서 조심해야 하는 구간입니다.

 

범바위에서 야호하는 두 분..

 

오른쪽은 안산

 

거의 다 내려오니 내 성곽길, 외성곽길로 갈라지는데 오늘은 내 성곽길로 내려왔습니다.

 

 

성곽 따라 흰 접시꽃, 빨간 접시꽃이 피어 있고 코스모스도 몇 송이 피었네요. 인왕산 성곽길은 24시간 개방인 데다 성곽 따라 조명이 잘되어 있어서 야간 산행의 재미를 느껴볼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합니다. 

 

인왕산도 1.21 공비침투 사건 이후 출입통제 되다가 1994년에 다시 개방되었습니다.

 

어니스트 베델의 집터입니다. 1904년 조선에 온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은 이해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활동을 힘껏 지원한 분으로 이곳은 그가 조선에 와서 사망(1909년)할 때까지 가족과 함께 살던 한옥 터입니다. 참조 <배설가지 안내문> 좀 더 들어가면 홍난파 선생의 가옥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딜쿠샤(테일러 가옥)도 모르고 지나친 것이 아쉽네요. 딜쿠샤는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UPI 통신원을 겸하면서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1923-1942)했던 서양식 건축물인데요,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2006년 그의 아들 부르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일반에게 개방은 안되고 있다고 하네요. 딜쿠샤 바로 옆에 수령 450년 되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장군의 집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고 있으며 행촌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이 나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참조 <서울한양도성 홈 딜쿠샤 안내문>

 

정동제일교회는 배재학당의 교장이었던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입니다. 이곳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필 박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주시경 선생 등 한국 개화기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예배를 보며 미래를 준비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1918년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고 3.1 운동 당시 오르간 뒤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항일활동의 거점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이곳에서 열리기도 하였으며 1920년 당시 이화여고 학생이었던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참조 <정동제일교회 안내문>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는데, 그 후 세종 30년(1448), 성종 10년(1479), 고종 연간에 큰 수리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매일 밤 인정(10시 무렵)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날 아침 파루(4시 무렵)에 문을 열었는데, 이때 문루에 종을 달아 그 시간을 알렸다고 합니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몸소 기우제를 지내는 등 숭례문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곤 하였습니다.

 

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누각은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구조가 견실하여 조선초기의 건축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07-1908년에는 좌우 성곽이 철거되기도 하였으며 2008년 2월에는 방화사건으로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하면서 이때 좌우 성곽도 현재의 모습으로 함께 복원하였습니다. 참조 <숭례문 안내문> 

 

한양도성길 인왕산구간-숭례문구간의 이정표 모음입니다. 돈의문의 터 근처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스탬프 박스는 삼성병원 응급실로 들어가는 정문 경비실 외부에 놓여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워요. 숭례문에서 스탬프 찍고 서울역 4번 출구에서 트레일링을 마친 오늘의 걸은 거리는 10 km입니다.

 

 

오늘의 트레일링 경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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